2026-10-18T06:46:42.259+00:00 · 주일예배 메시지
2026년 마태복음 27강 "겸손의 왕 예수님"
2026년 마태복음 27강 "겸손의 왕 예수님"
마태복음 제 27 강 2026. 10. 18
겸손의 왕 예수님
말씀/ 마태복음 21:1-22 요절/ 마태복음 21:5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사람들은 내 인생은 내 것이라고 생각하고 내 뜻대로 살고자 합니다. 하지만 지내놓고 보면 내 뜻대로 되지 않고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내 인생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오늘 본문은 내 인생은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임을 보여줍니다. 내 인생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때 우리는 분명한 목적이 있는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예루살렘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날 종려주일은 유월절 기간이 시작되는 날이어서 많은 순례객들이 예루살렘 도시로 몰려들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동편에 있는 감람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님은 두 제자를 보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맞은 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예루살렘까지 1마일 정도밖에 남지 않았기에 조금만 걸어가면 될 터인데 예수님은 왜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고자 하십니까? 그리고 왜 나귀 새끼뿐만 아니라 어미 나귀도 끌고 오라고 하십니까? 나귀 새끼는 아직 누구도 타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어미 나귀가 함께 있어야 통제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나귀와 나귀 새끼를 빌려가고자 할 때 나귀의 주인의 허락이 필요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두 제자가 도둑으로 몰리지 않도록 할 말을 미리 알려 주셨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제자들이 주가 쓰시겠다고 말하면 주인은 토 달지 않고 주님께서 사용하시도록 나귀와 나귀 새끼를 내어 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번에는 다른 때와 달리 나귀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그리고 자신을 주 즉 Lord로 드러내십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한 적이 있지만 예수님이 스스로 자신을 주님으로 드러낸 적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루살렘 입성을 앞두고 예수님은 주님으로서의 정체성을 적극적으로 드러내셨습니다.
나귀의 임자가 있지만 나귀의 진정한 주인은 예수님입니다. 나귀 뿐만 아니라 세상 만물이 다 예수님의 것입니다. 예수님은 천지와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나귀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주님의 뜻대로 나귀를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내 인생은 내 것이라고 하면서 자기 원하는 대로 살고자 합니다. 하지만 내 인생은 내 것이 아니라 나를 창조하시고 나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예수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뜻을 고집하고 관철시키려고 해서는 안 되고 내 인생의 주인되신 예수님의 뜻을 알고 그 분의 뜻을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주가 쓰시겠다고 하실 때 우리는 나의 시간과 물질과 재능과 은사와 젊음과 가정을 주님께 드려야 합니다. 나를 세계선교에 쓰시고자 주님께서 부르실 때 이사야와 같이 “주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응답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주님께서 나를 캠퍼스 목자요 성경선생으로 부르실 때 아멘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또한 가정 교회를 위한 결혼 방향을 주실 때 이런 저런 조건을 말하며 뒤로 빼지 말고 마리아처럼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고 믿음의 결단을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고자 하십니까? 그것은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 즉 이사야 62장 11절과 스가랴 9장 9절 말씀을 이루려 하심입니다. 5절을 보십시오.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예수님은 메시아에 관한 구약의 말씀을 성취하기 위해서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고자 하십니다. 시온 딸은 예루살렘을 가리킵니다. 종려주일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것은 왕으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내기 위한 것입니다. 왕이라면 백마 타고 군대와 함께 화려하게 입성해야 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예수님은 세상 왕과 다른 모습으로 오십니다. 예수님은 겸손하여 나귀 그것도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십니다.
나귀는 겸손을 상징합니다. 나귀 새끼는 어린 아이들도 가까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백성들이 감히 쳐다볼 수 없는 그런 왕이 아니라 누구나 가까이 갈 수 있고 친구가 될 수 있는 겸손의 왕이십니다. 또한 나귀는 평화를 나타냅니다. 나귀 타고 오시는 예수님은 평화의 왕이십니다. 세상 왕들은 전쟁을 일으켜 많은 백성들을 희생시키고 자기 권력을 강화시키려고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백성들을 한 사람 한 사람 겸손하게 섬기심으로 평화를 주시는 진정한 왕이십니다.
두 제자는 가서 예수님께서 명하신대로 하였습니다. 그때 놀랍게도 나귀 임자는 흔쾌히 나귀와 나귀 새끼를 내어 주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통찰력과 권세에 감동이 되었고, 예수님을 그들 인생의 주님으로 깊이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은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었습니다. 겉옷을 드린 것은 자기의 소중한 것을 드려 주님을 섬긴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때 순례객 중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 가지를 베어 길에 폈습니다. 이는 왕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환영하고 충성과 복종을 표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며 소리 높여 찬양했습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호산나’는 ‘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 라는 뜻입니다. 많은 이들은 예수님을 로마 정부로부터 그들을 구원해 줄 메시아로 보고 열렬히 환호하며 환대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메시아관이 잘못되었다 하면서 그들을 저지하거나 책망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찬송과 환영과 환대를 다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메시아요 왕으로 드러내시고 자신의 왕권을 예루살렘과 온 세상에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말했습니다. “이 사람은 누구냐”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이를 볼 때 예루살렘에 모인 사람들에게 ‘예수 그는 누구인가?’가 화두가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메시아요 왕으로 보고 어떤 이들은 나사렛 출신의 선지자로 보았습니다. 예수님이 인류의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요 화목제물이 되신다는 것을 아는 이들은 거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예수님이 대적들을 멸하고 새로운 나라의 왕이 될 거라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정권을 타도하는 데는 관심이 없었고 성전이 어떠한지 살피고자 성전 뜰로 가셨습니다. 성전 뜰, 즉 이방인 개종자들이 기도하고 예배하는 장소인 이방인의 뜰은 장사꾼들과 환전상들과 짐승들의 소리로 시끄러웠습니다. 성전이 참 모습을 잃고 시장처럼 되고 더럽혀져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의 부패한 모습을 보고 영적 분노를 발하셨습니다.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책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셨습니다. 이는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행동이요 혁명적인 도발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을 더럽힌 그들에게 성전이 어떤 곳이 되어야 하는지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로 만드는도다.” 하나님은 이사야 56장 7절에서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들은 하나님의 집인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이방인의 뜰에서 희생제물을 매매하고 돈을 바꾸도록 허용한 이들은 제사장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먼 곳에서 희생제물을 가져오면 상처 입을 수 있기 때문에 이방인의 뜰에서 매매할 수 있도록 편의를 봐주고 수수료를 챙겼습니다. 상인들은 동물과 비둘기를 높은 가격으로 팔아 이득을 취했습니다. 환전상들은 환율을 높임으로 고수익을 창출했습니다. 상인들과 동물들이 이방인의 뜰을 차지함으로서 이방인 개종자들은 기도와 예배하는 장소를 잃고 말았습니다. 성전의 부패는 종교지도자들과 유대 백성들의 부패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온유하시고 겸손하신 분입니다. 동시에 예수님은 죄에 대해서는 분노하시고 심판하시는 분이요 공의의 하나님입니다. 성전은 기도하는 집이 되어야 하고 참된 예배가 행해져야 합니다.
오늘날 성전은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입니다. 음행으로 더럽혀진 고린도 성도들에게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6:19,20)
예수님은 성전이 어떤 곳이 되어야 하는지를 현장을 통해 생생하게 보여 주셨습니다. 맹인과 저는 자들이 성전에서 예수님께 나아왔을 때 예수님은 그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장애인들은 성전에 들어올 수 없는데 그들이 어떻게 들어왔는지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율법을 범했다고 책망하거나 쫓아내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다 영접해 주시고 안수하사 건강의 복을 선물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성전은 연약한 자들과 병든 자들이 와서 치유되고 회복되는 곳이 되어야 함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오늘날 어떤 교회들은 문턱이 높아서 보통 사람들은 출입하지 못합니다. 문턱을 낮추어야 하고 소외된 자들을 외면하지 않고 환대하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임을 명심하고 말씀과 기도와 사랑으로 병든 영혼들을 치유하고 회복하는 참 교회의 모습을 세워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화가 많이 났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이상한 일과 또 성전에서 소리 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어린이들 때문이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의 성전 청결과 장애인 치유에 대해 분노했습니다. 무슨 권한으로 그런 일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고, 그런 이상한 일들은 율법과 공공 질서를 무너뜨리는 위험한 일이라고 판단했습니다. 무엇보다 어린 아이들조차 호산나 찬양을 예수님께 하는 것을 보고 화가 치밀어 거칠게 말했습니다. “그들이 하는 말을 듣느냐”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하게 하셨나이다 함을 읽어본 적이 없느냐” 예수님은 시편 8:2을 인용하여 하나님이 자신을 위하여 아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송을 마련하셨다고 해석해 주셨습니다. 뜻도 모른 체 재미 있게 부른 어린 아이들의 찬양도 예수님은 다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남녀노소 모든 인생들의 찬양과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주님이시오 만왕의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베다니에서 주무시고 이른 아침에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오는 중이었습니다. 그때 식사를 하지 않은 상태라 시장하셨습니다. 길 가에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열매를 기대하시고 그리로 가셨습니다. 그런데 잎사귀 밖에 없었고 열매를 찾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열매 없는 그 나무에게 저주의 말을 하셨습니다. “이제부터 영원토록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말을 했을 뿐인데 놀랍게도 그 무화과나무는 곧 말라버렸습니다. 우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예수님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무화과나무 열매를 먹고자 했는데 아무 열매도 찾지 못해 화가 나서 저주한 것입니까? 그 때는 무화과 열매 맺을 때가 아니었기에 열매가 없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화과나무는 잘못이 없습니다. 문제는 잎이 무성한데 열매가 없는 것입니다. 잎이 무성하면 작은 열매라도 맺어야 하는데 그런 열매도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배를 채우지 못해 감정적으로 그 나무를 저주하신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과 우리 인생들에게 영적 교훈을 주시기 위해 의도적으로 열매 맺지 못한 그 나무를 저주하신 것입니다.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는 부패한 성전과 종교지도자들과 유대백성들을 가리킵니다. 더 나아가 열매 없는 우리 인생들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은 열매를 원하십니다. 믿음의 열매, 사랑의 열매, 생명의 열매를 원하시고, 겸손과 온유와 충성과 절제의 열매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를 맺지 못할 때 우리는 저주와 심판에 던져지게 됩니다.
제자들은 말라버린 나무를 보고 깜짝 놀라 말했습니다.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될 것이요.” 예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원하는 자들을 구원하실 수도 있고 원하지 않는 자들을 심판하실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능력이 무한하시기 때문에 자기의 뜻대로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능력이 제한되어 있고 만 가지가 부족합니다. 하지만 만일 그들에게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예수님이 하셨던 일을 그들도 할 수 있습니다. 무화과나무를 마르게 할뿐만 아니라 이 산을 들어 바다에 던지는 큰 일도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능력으로 그런 놀라운 일들을 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믿음을 통해서 주님께서 능력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믿음은 무엇입니까? 나는 할 수 없지만 주님은 할 수 있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그대로 된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믿음을 가지지 못하게 하는 가장 큰 세력은 의심입니다. 의심이 들어오고 불신이 커지면 믿음은 작아지고 사라집니다. 의심은 사탄이 심습니다. 믿음을 가지려면 사탄과 싸우고 의심을 물리쳐야 합니다.
예수님은 믿음과 함께 기도에 대해 가르치십니다.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믿음의 세계로 들어가려면 기도해야 됩니다. 믿음과 기도는 함께 가고 서로 세워줍니다. 믿음을 가진 자들은 기도의 자리에 나아갑니다. 기도할 때 믿음이 강화되고 믿음이 자라게 됩니다.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지상을 떠나시게 되면 제자들은 복음역사를 자립적으로 섬겨야 할 것입니다. 제자들의 가장 큰 무기는 기도입니다. 제자들은 기도를 통해 위로부터 능력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전할 수 있습니다. 기도를 통해 교회를 개척하고 한 생명을 살리고 열두 제자들을 양성할 수 있습니다. 기도를 통해 복음의 대적들을 물리치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할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할 때 연약함과 한계를 이기고 기쁨과 행복이 넘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겸손의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왕이시지만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오셔서 우리를 섬겨 주셨습니다. 이 예수님을 믿고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않을 때 생명을 얻고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