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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BF춘천UBF교회

2026-09-20T10:45:54.575+00:00 · 주일예배 메시지

2026년 마태복음 23강 "해 같이 빛나신 예수님"

2026년 마태복음 23강 "해 같이 빛나신 예수님"

2026. 9. 20 제 23 강 해 같이 빛나신 예수님 말씀/ 마태복음 17:1-20 요절/ 마태복음 17:2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아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는 어떤 예수님이 각인되어 있습니까? 영광의 주님이십니까? 고난만 받고 비참한 결말을 맞이하는 주님이십니까? 예수님은 본래 영광의 빛으로 충만하신 분이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의 영광을 보고 주님의 발자취를 끝까지 따르는 참 제자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예수님의 그리스도의 길에 대한 첫 번째 가르침이 있던 날로부터 엿새 후에 예수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 중 핵심 제자 그룹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고백했지만 그리스도의 길 즉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할 것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떠나신 이후 하나님의 역사를 계승해야 할 사람들로서 십자가의 복음을 반드시 영접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능력 많으신 그리스도께서 왜 고난과 죽음의 길을 가셔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고, 자기들이 그 뒤를 따라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하는지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의 길에 대한 말씀을 들은 이후 그들은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고 밥맛도 떨어졌습니다. 예수님은 어찌하든지 제자들에게 십자가의 복음을 심고자 핵심 멤버들만을 데리시고 높은 산 헬몬산에 올라가 따로 시간을 가지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영적 눈이 열릴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기도하시는 중 예수님은 어떤 모습으로 변화되셨습니까? 2절을 보십시오.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예수님은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평상시 모습과는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선지자 이사야가 예언한 대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고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었습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요,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습니다(사53:2,3). 하지만 높은 산에서 변화되신 예수님의 모습은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났습니다. 얼굴뿐 아니라 온 몸에서 광채가 발하여 그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심을 말해 줍니까? 그 본체가 하나님이심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영광의 빛으로 충만하신 것처럼 예수님도 영광의 빛으로 충만하십니다. 하나님이 죄도 없고 흠도 없으신 것처럼 예수님도 죄도 없고 흠도 없으신 분으로 거룩하십니다. 요한계시록 1장 14-16절은 영광의 빛으로 충만하신 예수님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그의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그의 오른 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의 입에서 죄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치는 것 같더라.”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대면하고 내려왔을 때 그의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났습니다(출34:29). 하지만 예수님은 얼굴뿐 아니라 온 몸에서 빛을 발산할 만큼 영광의 빛으로 충만하셨습니다. 물론 이 때 예수님의 몸은 부활의 몸, 신령한 몸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변형되신 예수님은 그 분의 본래 모습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거룩하신 분이신지 보여주기에 충분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영광을 보여줌으로서 그들이 십자가 복음을 받아들이길 원하셨습니다. 그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더불어 말하는 것이 그들에게 보였습니다. 이는 참으로 놀라운 광경이었습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고난을 많이 받은 하나님의 종이요 구약을 대표하는 인물로서 메시아의 예언자요 메시아의 선구자입니다. 이런 그들이 빛나는 모습으로 등장하여 예수님의 별세에 대하여 대화를 나누었다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이 하나님의 뜻이요 구약말씀을 성취하는 중대한 사건이라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들은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있는 예수님을 위로하고 힘을 실어 주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 세 사람에게서 쏟아지는 영광의 광채에 넋이 나가 자기도 모르게 예수님께 이런 요청을 하고 말았습니다.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베드로는 집 세 채를 짓고 주님과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여기서 영원히 살고 싶었습니다. 그는 현재의 영광을 놓치고 싶지 않았고 세세토록 누리고 싶었습니다. 산 밑으로 내려가면 양들이 기다리고 많은 문제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더 이상 고생하고 싶지 않았고 이제는 쉬고 싶고 영광에 머물고 싶었습니다. 베드로가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었습니다. 그리고 구름 속에서 어떤 소리가 났습니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그것은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영광에 취해 있는 베드로와 제자들을 돕기 위해 하나님께서 친히 개입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요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메시아입니다. 이는 베드로와 제자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 것과 일치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하신 모든 말씀에 귀를 기울어야 하고, 특히 십자가의 죽음에 관한 말씀을 잘 들어야 합니다. 그들은 고난 없는 영광, 십자가 없는 승리를 고집하며 어려운 길보다 쉬운 길을 가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복음의 증인이 되고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이루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말씀, 십자가의 복음을 반드시 영접해야만 했습니다. 제자들은 천둥과 같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엎드려 심히 두려워했습니다. 하나님의 위엄 앞에서 그들은 고꾸라졌고 두려움에 압도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아와 그들에게 손을 대시며 위로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라 두려워하지 말라.” 이 말씀으로 제자들은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눈을 들어 보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사라지고 오직 예수님만 남았습니다. 이는 예수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요 왕이심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믿고 의지할 대상은 모세도 엘리야도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가 제자의 길을 가고자 할 때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자립의 문제가 있고 인간관계의 문제가 있습니다. 과연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있습니다. 고난 많은 이 길을 끝까지 갈 수 있을까, 더 늦기 전에 내 실속을 차려야 하지 않나 하는 갈등이 있습니다. 고난과 아픔과 희생만 생각하는 사람은 제자의 길을 갈 수 없습니다. 제자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내 마음에 영광스러운 주님이 새겨져 있어야 합니다. 영광에 대한 믿음과 소망이 있을 때 우리는 자기 십자가를 감당할 수 있고 어떤 고난과 가난과 위기 앞에서도 제자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많은 고난을 경험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8:17,18) 산에서 내려올 때 예수님은 세 제자들에게 명하셨습니다.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이는 산 위에서 경험한 특별한 사건에 대해 당분간 침묵하라는 것입니다. 그 신비로운 경험을 말해 주어도 사람들이 믿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세 제자들도 그 사건의 의미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는 그 사건의 의미를 알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신비로운 체험을 할 때 그것을 소화하기까지 묵상과 침묵의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 체험이 말씀에 부합하는지 잘 점검해보고 마음에 확신이 있을 때 내가 받은 은혜를 전하는 것이 좋습니다. 베드로는 나중에 그의 서신에서 변화산상 사건을 주님의 재림과 연결하여 이렇게 증거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교묘히 만든 이야기를 따른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그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이 소리는 우리가 그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부터 난 것을 들은 것이라.”(벧후1:16-18) 제자들은 엘리야와 관련하여 한 가지 의문점이 있어서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서기관들 즉 율법선생들은 말라기 말씀에 메시아가 오기 전에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했는데 엘리야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에 메시아도 오지 않았다고 가르쳤습니다. 서기관들의 가르침으로 제자들도 약간의 혼란에 빠졌습니다. 엘리야가 온 것인지 안 온 것인지 그들은 헷갈렸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엘리야가 이미 왔으며,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제서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세례자 요한인 줄 깨달았습니다. 오리라고 예언된 메시아의 선구자 엘리야는 바로 세례자 요한이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고난과 죽음은 그리스도의 길이 어떠한지 잘 보여주었습니다. 14-20절은 산 아래의 모습이 어떠한지 잘 보여줍니다. 예수님과 세 제자들이 산 아래로 내려왔을 때 많은 무리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한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꿇어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애절하게 간구했습니다.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그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 그 아버지는 간질로 고생하는 아들 문제를 들고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마침 예수님이 부재 중이라 남아 있는 아홉 제자들에게 아들을 고쳐달라고 했는데 능히 고치지 못했습니다. 이 문제로 많은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그런 중 예수님이 오시자 그 아버지는 이제 살았다 하며 아들의 심각한 상태를 구구절절히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들의 병을 고쳐주기 전에 먼저 그 세대를 가리켜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라고 진단하셨습니다. 패역하다는 것은 부도덕하다, 부패하다는 뜻입니다. 그 시대의 문제는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기 때문에 세상이 썩고 많은 질병과 귀신 들림과 고통과 죽음이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도 믿음이 없고, 율법선생들도 믿음이 없고, 백성들도 믿음이 없고, 제자들마저 믿음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얼마 후면 이 세상을 떠나서야 합니다. 그들과 함께 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뒤를 이어 하나님 역사를 섬겨야 할 제자들만이라도 믿음이 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조차 믿음이 없기 때문에 간질로 고생하는 아이를 고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전도여행 할 때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쳤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세 제자들에 대한 시기심과 경쟁심이 앞섰기 때문에 실패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많은 지식도, 많은 스펙도 아니고 오직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어떤 문제 앞에서도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아홉 제자들은 하나님과 예수님을 바라보기보다 과거의 경험을 의지하고 자기들의 열심과 능력을 믿었습니다. 과거에 병을 고쳤다고 오늘도 병을 고칠 수 있나요? 과거에 양을 먹이고 제자를 세웠다고 오늘도 똑같이 능력을 행할 수 있나요? 치유의 능력이 나타나려면 오늘 현재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믿음은 나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질 때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믿음 없는 세대를 책망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 아이를 이리로 데리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를 사로잡고 있는 귀신을 꾸짖었습니다. 그러자 귀신이 나가고 아이가 그 즉시 나았습니다. 병의 원인은 귀신 들림이었습니다. 귀신이 그 아이에게 들어가 간질 증상을 일으켜 고통을 주었고, 자주 불에도 넘어지게 하고 물에도 넘어지게 했습니다. 귀신이 그를 지배하고 죽음의 골짜기까지 끌고 다녔습니다. 하지만 예수의 이름 권세로 귀신이 나가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아이는 정상으로 돌아왔고 아버지의 품에 안기게 되었습니다. 이 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예수님께 나아와 말했습니다.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이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은 무엇입니까? 20절을 보십시오.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그들은 믿음이 작기 때문에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습니다. 믿음이 작기 때문에 아이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만일 그들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산을 명하여 옮길 수 있고, 못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믿음의 위력은 놀랍습니다.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고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기 위해서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능력의 통로입니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을 때 요지부동의 산도 옮길 수 있고, 불가능한 일에도 도전할 수 있습니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겨자씨 한 알은 아주 작습니다. 하지만 그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 내면에 심겨진 온전한 믿음, 견고한 믿음을 가리킵니다. 사탄은 우리의 믿음을 빼앗아가고 믿음을 무너뜨리기 위해 많은 것들을 동원합니다. 생활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빠지게 합니다. 두려움과 의심을 심습니다. 사도 바울은 제자 디모데에게 목자로서 가장 힘써야 할 것이 믿음의 선한 싸움이라고 했습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딤후6:12) 나의 믿음을 흔드는 염려와 두려움과 의심을 물리치고 온전한 믿음을 가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온전한 믿음을 가질 때 물질의 산을 옮길 수 있고, 전도와 제자양성의 산을 옮길 수 있고, 불가능하게 보이는 일에도 도전하고 정복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본체가 거룩하시고 영광의 빛으로 충만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땅만 보고 힘든 현실만 보면 낙심이 되고 길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눈을 들어 하늘을 보고 영광의 빛으로 우리를 비추고 계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심령을 영광의 빛으로 채워 주시고, 우리가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질 수 있도록 때마다 은혜 부어 주시길 기도합니다.